안녕하세요. 편집장 장재열입니다. 휴가철이 한창이네요. 다들 어떻게 지내고 계신가요? 이미 여름휴가를 다녀오신 분도 계실 것 같고,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계신 분도 계실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여름엔 휴가를 잠시 미뤘어요. 얼마 전 과학 토크쇼 MC를 맡게 됐는데, 교수님들이 주로 출연하시다 보니 아무래도 방학 기간을 선호하시더라고요. 교수님들 일정을 최대한 배려하다 보니 7, 8월에 촬영이 몰렸습니다. 처음에는 '아, 하필 딱 휴가철이네.'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 순간 이렇게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어? 오히려 성수기를 피해서 가는 게 더 좋은 거 아닌가? 오히려 좋아!'
생각해 보면 이런 저의 관점 변화도 여러분 덕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1년이나 2년에 한 번 바짝 써서 내는 책과 달리, 뉴스레터와 매거진은 상시로 발행하는 것이다 보니 늘 마음 건강에 대해서 제가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되잖아요. 그러다 보니 점차 제 마음과 관점도 더 많이 건강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저를 비롯한 필진들이 여러분을 위해 레터를 만들지만, 결국은 여러분이 계시기에 서로가 서로의 마음 건강을 북돋아 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럼, 고마운 여러분께 정성껏 준비한 이번 레터도 시작해 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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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눈에 보는 오늘의 마음건강
① 책 | 나의 모든 시절을 껴안는 시간 ② 칼럼 | 내 카톡엔 왜 늘 '더 보기'가 붙을까 ③ 이달의 마음건강 강연 및 교육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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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모든 시절을 껴안는 시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김상래 외
editor 강동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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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의 문을 열고 닫으며 하루를 보낼 때면, 새삼 시간이란 참 정직하지만 무심하게 흐른다는 것을 느낍니다. 갓난아이 같던 두 아이가 어느새 훌쩍 자라 초등학교 3학년, 4학년 가방을 메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볼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들의 시간은 저토록 눈부신 속도로 앞으로 달려가는데, 서가를 정리하고 모임을 운영하며 보내는 저의 시간은 과연 어떤 무늬로 쌓이고 있는지 가만히 멈춰 서서 돌아보게 되는 나날입니다.
우리는 흔히 시간이 쫓기듯 소비해야 하는 자원이나, 속절없이 흘려보내는 아쉬운 것으로 여기곤 합니다. 과거를 후회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불안해하느라, 정작 가장 빛나는 현재의 시간은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게 내버려둡니다. 하지만 시간은 허망하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면에 겹겹의 나이테처럼 쌓여 지금의 나를 고유하게 빚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재료입니다. 내 삶을 스쳐 간 모든 시절을 회피하지 않고 가만히 껴안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시간에 쫓기지 않고 온전한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처럼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앞에서 삶의 의미를 묻는 분들을 위해, 열두 명의 작가가 써 내려간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를 소개합니다. 1999년생 대학생부터 1970년생 대표까지, 각기 다른 생의 계절을 통과하고 있는 이들이 유년, 청년, 중년, 노년에 이르는 다채로운 시절을 진솔하게 풀어낸 이 책은, 결국 우리 모두의 삶을 긍정하게 만드는 따뜻한 위로가 되어줄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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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속 한 줄
아이에게 가까운 어른으로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로 치유의 과정이 될 때가 있다. 나와 별개의 타인이지만, 내게 있는 욕구가 상대에게도 있다고 가정하고 또 나와 상대를 동일시할 수 있는 상상력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간절히 바랐으나 만나지 못했던 어른의 모습을 하고 아이 앞에 선다. 때로는 싱거운 농담을 하고 같이 배꼽을 잡는 이모로, 언제는 다친 상처를 물어봐 주는 이웃 아줌마로, 또 언제든지 기댈 수 있는 강인한 엄마의 얼굴을 하고 아이를 마주한다. - 김상래 외,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멜라이트, 2023, 97~98쪽
어른은 약하고 어린 누군가를 보듬어줄 수 있는 존재다. 마흔여섯의 나라면 어린 시절 그렇게도 원하던 어른의 돌봄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어린 시절의 내가 매 순간 이겨내고 싶어 했고, 도려내고 싶어 하던 흉터들을 잠잠히 응시하고 매만지는 것이다. 남이 보는 시선을 따라 내가 동요할 때마다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내 눈으로 보았을 때 보이는 세상을 내가 가진 언어로 하나씩 하나씩 새로 감각해나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뛰었다. 그러니까 어른의 시간은 남이 말했을 때 좋은 시간, 남이 말했을 때 좋은 조건이 아니라 내가 느끼기에 좋은 시간, 내가 느끼기에 좋은 조건을 찾아가는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그림자까지도 끌어안는 시간이라고 해야 적절하겠다.
- 김상래 외, 『나의 시간을 안아주고 싶어서』, 멜라이트, 2023, 180~18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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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카톡엔 왜 늘...🧐
'더 보기'가 붙을까
editor 장재열
혹시 그런 분 계시나요? 직설적으로 딱 요건만 말하는 게 잘 안되는 분이요. 카톡도 짧게 써야지, 짧게 써야지 하면서도 꼭 보내고 나면 더 보기가 생기는 분. 그래서 무슨 말을 하면 상대가 “미안한데, 너 말뜻은 이거지?” 또는 “그래서, 핵심이 뭐야?”라고 되묻기도 하는 분. 사실 제가 그 케이스랍니다. 근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지가 얼마 안 됐어요. 자각한 게 꽤 최근이었거든요.
계기는 진짜 사소했는데. 친한 친구랑 수다를 떨다가 그 친구가 웃으면서 이러더라고요. “나는 다른 사람들 카톡은 오면 바로바로 답하거든? 근데 네 카톡은 뒤에 더 올 거 아니까 좀 기다렸다가 봐.” 뭐 저를 나무라거나 지적하는 게 아니었어요. 오히려 “그게 너랑 내가 잘 지내는 방식이야.” 하는, 되게 다정한 말이었죠. 근데 저는 거기서 좀… 충격이라기보다는, ‘어? 내가 그렇게 길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슬쩍 제 대화들을 다 찾아봤어요. 근데 진짜 그렇더라고요. 제일 오래된 친구 여섯 명 있는 단톡방을 표본으로 세어봤는데, 나머지 다섯 명이 보낸 걸 다 합친 것보다 저 혼자 보내는 카톡의 단어량이 더 많은 거예요. 아니, 5:1인데 이럴 수가 있나. 싶더라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이걸 ‘아, 내가 사람들 엄청 피곤하게 하는 건가?’라고 생각해서 ‘고쳐야 할 부분’이라고 인식했어요. 뭔가 결함? 같았거든요. 그래서 제 성격상 ‘내가 왜 이러지?’라고 하면 좀 분석을 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이걸 한번 파헤쳐 보기로 했죠. 단, 감정에 빠지는 게 아니라 구조적으로요. 그래서 제가 보냈던 카톡이랑 메일을 좀 모아서, 어떤 상황에서 유독 길어지는지 하나하나 살펴봤어요. 어떤 공통점이 있나? 늘 길게 보내는 건 아닐 텐데, 특정한 상황이나 요건이 있을 거 같아서 AI한테도 물었고요. “한 줄이면 될 말을 스무 줄, 서른 줄로 늘려 쓰는데, 나는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어떤 상황에서 이게 더 심해지는 걸까? 패턴이 혹시 있는 것으로 보이니? 해석은 내가 할 테니, 패턴을 좀 발견해 볼래?” 이런 식으로요. 그렇게 한참을 분석하다가, AI가 이런 ‘공식’을 하나 제안했는데, 이게 꽤 흥미로웠어요. 제 말이 길어지는 정도가 대략 이렇게 정해진다는 거예요.
말이 길어지는 정도 = ( 권리를 침해당한 정도 × 관계 지속성 ) ÷ 친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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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이런 거죠. 누가 내 선을 넘거나 무례를 범했어요(침해 정도). 근데 하필 이 사람이 한 번 보고 말 사이가 아니라, 계약 관계라 앞으로 몇 년을 더 봐야 해(지속성), 그러면 사실 “이 *놈아!” 하고 확 뱉고 끊어버릴 수가 없으니까 쿠션어를 열 개 스무 개 넣는 거예요. 관계는 덜 해치되, 내가 할 항의는 해야 하니 이게 참 길어지더라고요. 그나마 이 사람이랑 친한 사이면 괜찮은데 데면데면하기까지 하다? 오해를 살 여지를 줄이려고 더 길어져 버리는 거예요. 실제로 맞는 말 같아서 저 조건식에 해당하는 톡을 워드에 복붙해봤더니 A4 두 장 반 분량까지도 나오지 뭐예요. 반대로 아주 친하거나, 아니면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면 꽤 짧아졌어요.
근데 여기서 멈췄으면, 저는 그냥 ‘아, 나는 침해당할 때 말이 길어지는 사람이구나’ 하고 말았을 거 같은데요. 최근에 거울 효과랄까요? 다른 분을 통해서 또 다른 국면을 발견하게 됐어요. 늘 제가 리더를 많이 맡잖아요? 그런데 드물게도 제가 팔로워로 참여한 프로젝트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저는 정말 관찰자가 되거든요. 조용히 그냥 지켜봐요. 누구 상처받는 사람은 없나. 누구 무례한 사람은 없나. 그런데 어느 날 프로젝트 구성원 한 분이 카톡을 더 보기가 달린 매우 긴 걸 세 개나 연달아 보내신 거예요. 더 보기, 더 보기, 더 보기. 늘 저는 그렇게 보내는 사람이었다가 받는 사람이 되니까, 헉. 눌러볼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근데 심호흡 딱하고 준비한 뒤 읽어보니까, 그분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딱 하나였어요. “저 혼자만 너무 일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말을 차마 못 하고, “다들 바쁘시겠지만…” 하면서 그 긴 걸 쓰신 거죠. 딱 저 같더라고요. 그분도 저도, ‘나만 혼자 일하냐?’라는 말을 도저히 못 하는 사람인 거예요. 하지만 카톡을 받는 상대도 안 다치게, 보내는 나도 안 다치게. 복합적인 배려가 깔려 있었다는 게, 타인이 되어 바라보니 알겠더라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너무 길게 말하는 이 성향은 꼭 누군가를 피곤하게만 하는 건 아니었어요. 한 에피소드가 있는데요. 제가 연초에 베트남에서 한 달살이를 하고 왔거든요. 홈페이지 섭외 알림 시스템이 저도 모르게 고장 나 있었는데, 그 바람에 귀국해서 보니 두 달 가까이 답변을 못 한 섭외 문의가 서른두 개나 쌓여 있었던 거예요. 혼비백산해서 한 분 한 분께 길게 사과드렸죠. “제가 지지리도 컴맹이라 이런 일이 생겼고, 정말 너무 죄송하다”고요. 근데 그중 한 담당자분이 이렇게 답을 주셨어요. “안 그래도 저희가 작가님 명성에 비해 너무 적은 섭외비로 연락드려서, 혹시 불쾌하셨던 건 아닐까 내부에서도 걱정하고 있었어요. 그게 아니라 정말 다행입니다.” 그 순간, 아, 세상에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작은 것 하나도 그냥 못 넘기고 수없이 해석해서, 그걸 다 신호로 받아들이는 사람. 그러니까 이렇게 길게 말하는 게, 누군가한테는 오히려 배려이고 따뜻함이고 다정함일 수도 있겠구나 싶었지요.
그래서 요즈음의 저는 ‘나는 왜 이럴까? 이걸 어떻게 고치지?’로 생각하지 않고, 대신 제가 언제 어떨 때 이러는지를 알았으니까, 그것에 맞게 저를 데리고 살고 있어요. 남들 눈치를 보느라 길어지는 건, 줄이는 연습을 하고 있고요. 내 권리가 침해당해서 항의할 때는 “길면 좀 어때? 예전엔 말조차 못 하고 그냥 삼켰는데, 엄청 발전한 거지”라고 자기 옹호의 마음으로 바라보고요. 배려심 때문에 앞뒤 상황을 다 설명하게 되는 건, 그것대로 누군가한테는 다정함으로 가닿을 테니 굳이 피곤해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가끔은 제가 봐도 야 이건 너무 주저리주저리 길다 싶어서, AI한테 “이거 좀 줄여줘” 하고 슬쩍 부탁할 때도 있지만 말이에요. 여러분은 어떠세요? 직설적인 쪽인가요, 아니면 저처럼 자꾸 말이 길어지는 쪽인가요? 그리고 어느 쪽이든 그런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계신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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